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작서의 변 (문단 편집) === 이후의 일 === 중종 29년(1534),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난 이듬해, 문정왕후가 첫 아들 경원대군(慶原大君: 미래의 [[명종(조선)|명종]])을 낳았다. 궁에 들어와 가례를 올린 지 무려 17년 만에 낳은 아들이었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중종의 눈밖에 나서 사사되었다. 그 뒤 김안로의 술책에 걸려 억울하게 죄를 얻었다 하는 이들을 풀어주거나 했지만,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그런 대상에 들어가지 못했다. 중종 36년(1541), 세자가 아버지 중종에게 용서해달라는 청원을 올려 중종이 가납했다. 그런데 여기서 세자가 청원한 내용이 아래와 같다. >천총(天聰)을 범함이 황공하오나 정(情)이 격발하여 아룁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천현지친(天顯之親)은 같은 기(氣)를 나누어 받아서 태어나기에 숨쉬는 것도 서로 통하여 우애로운 정을 자연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다 비상(非常)한 변(變)이 있었더라도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옛사람 중엔 오히려 은혜로 감추어 준 자도 있었습니다. 지난번 이미(李嵋: 복성군의 이름)의 일을, 신은 어려서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화의 참혹함은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朴氏)가 했다고는 하지만 미(嵋)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 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여(洪礪)도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이토록 극심한 변고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리로서 어떠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의 딸 하나가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 없이 되었으니,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는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두 옹주(翁主)도 나이 어린 딸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 >신(臣) 하나로 인하여 형제간의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이 항상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자신은 천자가 되었는데 아우는 필부(匹夫)로 있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은 세자로서 모시고 있어 천총(天寵)이 지극한데, 두 누이와 조카딸 하나가 아직도 천민에 버려져 있으니, 자신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 >사람이란 형제간에는 원망도 노염도 간직하지 않고 서로 친애할 뿐인 것인데, 신은 형제간에 무슨 원망과 노염이 있어 친애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에도 같이 화락하게 즐기지 못하여 슬프고 불쌍한 생각이 가슴에 더욱 간절합니다. 그러므로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다시 충정(衷情)을 아뢰어 천총을 욕되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불쌍히 여겨주소서'''. >---- >중종실록 중종 36년(1541) 11월 9일자 3번째 기사 요약해보면 미래의 인종인 세자는 복성군이나 경빈 박씨가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박씨가 죄를 지었다 해도 복성군이 연루되진 않았을 테고''', 그가 낳은 딸 하나는 민간으로 버림받아 평민과 다름없이 사는 모습이 불쌍하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것이다. 이때까지도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딱히 '무고함이 밝혀져' 신원된 것이 아니다. 세자 또한 그네들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지 않고, 계속 불쌍한 모습을 부각하며 형제의 정으로 견디기 힘들다고 중종에게 자비를 청했다. 그마저도 경빈을 두둔하지 않고 복성군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말이다. 중종은 세자의 청을 받아들여 복성군으로 복구하고 왕족의 예를 허락했지만, 딱히 경빈 박씨 - 복성군 모자가 무고하게 죽었다고 인정하지는 않았다. 저 위에 기록된 세자가 한 말을 보면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前此微達, 未蒙允兪)"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비록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전에도 세자가 같은 내용을 주청하였고 중종이 거부했음을 알 수 있다. 초기때는 중종도 그래도 친자식이라 복성군을 두둔하였지만 복성군은 서장자라는 흠이고 세자 인종을 보호하기 위함의 더 큰 문제가 작용하였기 때문에 서장자인 복성군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의견에 점점 크게 기울었고 스스로 납득하며 냉정하게 판단함으로써 행동했음이 분명하다. 이후로 실록에서 복성군은 '복성군'이라고 불리지만, 경빈 박씨는 '박빈' 또는 '박씨'라고만 언급된다. 공식적으로 신원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작인두의 변 때 홍여의 하인들이 고문을 받아 억지로 죄상을 실토했다거나, 홍여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은 실록에서 대신들이 언급하지만, 이들을 신원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폐서인된 옹주들의 신분을 되돌려주었을 뿐이다. 이후의 분위기를 보면 대체로 '억울하게 죽은 것 같기는 한데 오래된 일이라 증거도 없고, 임금(중종)의 체면도 있고 하니까 이 정도로 덮고 가자.'는 식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